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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보살사 대장님입니다. 보살사는 청주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서, 567년(진흥왕 28)법주사를 창건한 의신(義信)이 창건하였다. 그 뒤 진표(眞表)의 제자 융종(融宗)이 중창하였고, 923년(태조 6)에 고려태조의 다섯째 왕자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3창하였으며, 1107년(예종 2)에는 자정국사(慈靜國師)가 4창하였다. 공민왕은 전답(田畓)을 하사하여 향화공양(香火供養)의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1458년(세조 4) 12월에는 세조의 명으로 중수하였으며, 1626년(인조 4)에는 벽암(碧巖)의 제자 경특(瓊特)이 중수하였다. 그 뒤 1683년(숙종 9)에 일륜(日輪)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요사채가 있다. 정면 ..
문의면 월리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월리사 사적비와 금표비 그리고 이구당부도 입니다 주위에 꽃잔디가 참 이쁘네요. 월리사 입구에 부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장방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가로 170㎝× 세로 100㎝로 다듬고 중앙에 홈을 마련한 비좌 위에 너비 83㎝× 높이152㎝× 두께 24㎝의 비신을 세운 다음, 가로 110㎝× 세로 68㎝× 높이 52㎝의 팔작지붕형 개석을 덮은 조선후기 일반형 석비이다. 월리사를 중건하고 나서 그 사적을 새긴 비석으로 비액에는 자경(字徑) 9.5㎝의 전서(篆書)로 ‘월리사사적비기(月裡寺事蹟碑記)’이라 쓰여 있으며, 비문은 자경 5㎝의 해서체로 문의현령 윤동형(尹東衡)이 기(記)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서(書)하여 1665년(현종 6) 냉절(冷節, 寒食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공적을 기리는 전적비. 임진왜란 때 육상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청주성 전투에서 승군(僧軍)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전적비(戰蹟碑)이다. 청주시 내 중앙공원(中央公園) 동쪽 출입구 오른쪽 화단에 조헌(趙憲)[1544~1592]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옆에 있다. 높이 224㎝, 폭 82㎝, 두께 39㎝의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철제 보호난간을 둘렀다. 비의 제목은 “義僧將騎虛堂靈圭大師戰場紀蹟碑(의승장기허당영규대사전장기적비)”이다.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 짓고, 김응현(金膺顯)이 글씨와 전서(篆書)의 비 제목을 썼다. 비문의 내용은 영규대사가 임진왜란 때 800여명의 승병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충청도 병마절도사 본영의 정문.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으며,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본영을 드나들던 출입문의 문루(門樓) 이다.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轅門)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1955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공포형식은 이익공이며, 가구는 5량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구조는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사다리꼴의 방형 고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누하부에 문비시설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나, 누하부 중간에 외부 원기둥과 달리 네모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주초석도 낮게 구성한 상태로 보아 본래 이 부위에 대문을 달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남측 내부에 루마루로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청주목 관아의 누각. 망선루는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361년(공민왕 10)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하였다가 이곳에 옮겨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의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에 게시하였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1461년(세조 7)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또한 목사(牧使) 이섬(李暹)이 중수하였고, 목사 이수득(李秀得)이 수즙(修葺)한 일이 있다. 이후 청주보통학교 여자부 교사로 이용되다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의 비석.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의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戰蹟碑)로 그가 죽은지 약 120년 뒤인 1710년(숙종 36)에 세워졌다. 상당구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옮겨, 현재는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中央公園)의 동쪽 출입구의 오른쪽 화단에 서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밭침돌 위에 높이 230㎝, 폭 84㎝, 두께 37㎝의 몸돌을 세우고 그위에 머릿돌을 얹었으며, 주위에 12개의 시멘트 기둥을 세우고 철제로 보호 난간을 둘렀다. 비문은 윗부분이 풍화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비석의 앞에는 1974년 비문을 요약하여 세운 안내 표석이 있으며, 표석은 오석(烏石)의 화강암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