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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조선 고종(高宗) 때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1866년(고종 3)에 있었던 병인양요와 1871년에 있었던 신미양요를 통해 서양세력을 격퇴한 후 그 전승을 기념하고 척화를 강조하기 위해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충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청주 척화비도 이때 세운 것이다.상당구 남문로 2가 중앙공원(中央公園) 북쪽 출입구 안의 왼쪽 화단에 동향으로 서 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하여 세운 척화비는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군이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청나라에 납치해 가고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청주의 척화비도 이때에 철거되었는데 지금의 비석은 1976년 2월 20일 정찬일(鄭燦日)이 상당구 석교동 신충구(申忠求)의 집 앞 하수구의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
상당구 서문동 96번지에 있는 청주읍성 서문터는 서문동 오거리에서 성안길로 통하는 속칭 족발골목의 입구에 있다. 이곳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서문인 청추문(淸秋門)이 있었던 곳이나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 개정사업으로 헐리었다. 서문의 안에는 충청병영이 있었고 문밖에는 대교천 즉 지금의 무심천(無心川)이 흘렀으며 서쪽에는 사직단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청주성이 함락되자 1592년(선조 25) 8월 초하루 조헌(趙憲)[1544~1592]·영규대사(靈圭大師)[?~1592]·박춘무(朴春茂)[1544~1611] 등이 이끄는 의병이 이 문을 통하여 성을 탈환하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1710년(숙종 36) 서문 밖에 조헌 전장기적비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옮겨졌다. 청주의 서쪽 ..
조선 인조대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경여의 선정을 기려 인조 9년(1631)에 세운 비석으로 청주시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다. 비제는 일부 훼손이 있으나, “行牧使…德善政碑(행목사…덕선정비)”이며, 좌측면에 “淸白我公 勒之貞珉 化浹仁明 永留風聲 (청백아공 늑지정민 화협인명 영유풍성)”이라는 선정을 찬양하는 명문이 있다. 이경여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직부(直夫)이며,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다. 목사 이수록(李綏祿)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년 검열, 1617년에는 충원현감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청주중앙공원 화단에 자리하고 있는 귀부입니다. 청주시내 중심가인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중앙공원(中央公園) 내 동쪽 편 아래 화단에 ‘목사 이경여(李敬輿)[1585~1657] 선정비(牧使 李敬輿 善政碑)’가 있다. 그리고 이 선정비 오른쪽으로 15m 되는 지점에 머리를 서쪽으로 한 거북 대좌가 1기(基) 남아 있다. 거북 대좌 윗부분에 비석(碑石)이 남아 있지 않아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형식으로 볼 때,선정비로 추정된다.비신(碑身)을 세웠던 자리의 방형 구멍은 가로 61 ㎝×세로 23㎝이다. 이 거북대좌와 관련하여 1997년에 발행된 『청주시지(淸州市誌)』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명준(李命俊)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중앙공원(中央公園)에 현존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어 이 거북대좌가 선정비를 세..
김효성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자는 행원(行源)이다. 아버지는 양양부사(襄陽府使) 김수연(金秀淵)이며, 어머니는 좌승지 김희룡(金希龍)의 딸이다. 승지를 지낸 김세정(金世鼎)이 아들이다.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조(鄭造)·윤인(尹認)·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하자 고부천(高傅川)·김태우(金太宇) 등 24인과 함께 정조·윤인·이위경 등 3인의 목을 벨 것과 귀양가 있는 이원익(李元翼)을 다시 부를 것을 주청하였다가 길주(吉州)로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이배되었다.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복관되어 의금부도사를 제수받고,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1625년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