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보성오씨
- 공산성 선정비
- 각연사
- 충북의 문화재
- 오블완
- 문경새재
- 화양구곡
- 상당산성
- 공주박물관
- 화양동 암각자
- 밀양박씨
- 사과과수원
- 효자문
- 부도
- 선돌
- 법주사
- 효자각
- 문의문화재단지
- 한독의약박물관
- 부여박물관
- 곡산연씨
- 경주김씨
- 청주박물관
- 국립청주박물관
- 티스토리챌린지
- 단지주혈
- 사인암
- 청풍문화재단지
- 충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21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이 충신각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백면선생으로 의병을 일으켜 반란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된 충신 경주인(慶州人) 낙당(樂堂) 김한정(金漢廷, 1688∼1728)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60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문 편액을 걸었다. 이밖에 고종 24년(1887)에 김영목(金永穆)이 지은 "충각서(忠閣序)"와 고종 25년(1888)에 송근수(宋近洙)가 지은 "충려기(忠閭記)" 등의 기문판이 걸려 있다.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 길가에 위치하고있다. 석성리는 본래 청안군 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성리, 신하리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정하동에 있는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로다. 머리에는 마치 모자를 쓴 듯하며, 머리 뒤에는 동그란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얇은 선의 옷주름 표현이 돋보인다.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특징적인 손모양은 동화사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이나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과 비교된다. 직사각형의 얼굴, 잘룩한 허리, 볼륨있는 무릎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 엿보이는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주위 정리정돈도 잘해놓았다.주차시설등이 조금 미흡하다.코와 눈이 크게 훼손되었다. 속설에 의하면 부처님의 코를 긁어다가 돌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 기자사상..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괴정리(槐亭里) 사지에 남아 있는 불상으로 9세기 말~1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괴정리 사지(槐亭里寺址)에 있는 높이 222cm의 불상으로 재질이 좋지 않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마멸이 심한 편이지만 각부는 잘 보존되어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큼직하고 낮은 육계(肉髻)가 마련되어 있으며, 얼굴은 길고 사각형에 가깝다. 이마는 좁지만 백호공(白毫孔)이 있고 눈은 반쯤 떴으며, 코는 큰 편이나 심하게 마멸되었다. 입술은 두껍게 표현되었고 볼은 살이 쪄 있다. 양쪽의 귀는 좁지만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다. 어깨는 당당하고 가슴에는 살이 찐 원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
청주시 율량동에 위치한 서기사입니다. 효성장례식장 병원이 있는 곳에서 예비군훈련장을 통해 진입할수 있습니다. 서기사는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현재의 서운사 자리에 서기암(瑞氣菴)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청주목 방리조에는 서기암(瑞氣菴)이 관문의 북쪽 13리에 있으며 편호는 12호에 남자 16명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며,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사찰조에는 고을 북쪽 10리 율봉역(栗峰驛) 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청주목지도」와 전라남도 구례군의 운조루에 소장된 『여지도(輿地圖)』의 「서원지도(西原地圖)」에 서기암(瑞氣菴)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몇년전에 다녀왔는데 이번에 다시 방문을 하니 주위가 참 많이 변했다. 온통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지난 세월을 되집어 기억을 더듬었다, 아파트단지 뒤에 자리하고 있다. 아파트와 창리사지 사이에는 철재울타리가 비잉 둘러쳐져있다. 울타리 사이로 몸을 넣고 창리사지의 보살입상을 만난다. 후대(1975년)에 옆에 기거하던 무속인이 석불의 얼굴부분을 손을 보았다는데 생경한 모습이다. 석불옆으로는 자연석을 쌓아서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돌무더기 위에는 작은 선돌도 올려놓고 어찌보면 일종의 기자석 같은 치성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느낌이다. 비지정문화재의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