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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21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민건(閔楗)은 조선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민여개(閔汝漑)의 장남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였다. 고향집을 오고가며 가끔씩 시간이 될 때 마다 구길을 따라 차를 몰면서 지난것을 찾아보려고 둘러본다. 내수읍 원통리는 그중에 하나이다. 수확의 계절 가을인가 원통리 마을회관앞에 동리분들이 모여서 감수확에 박스포장이 한창이다. 원통리 지명의 유래는 源通里(원통이,원통)는 본래 청주군 북강내일면의 지역으로서, 원통사(源通寺)가 있었으므로 원통(源通) 또는 "원통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산리(台山里)와 내금리(內金里), 수내리(藪內里), 평촌리(坪村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원통리(源通里)라 해서 북일면(현 내수읍)에 편입되었다. 마을 뒷쪽으로 자리한 여흥민씨들의 선대묘소에..
초계변씨(1877~1939)는 평강인 전재우에게 시집와 부도를 지키며 길쌈으로 가업을 삼았다. 또한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남편을 공경으로서 받들었다.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를 보존하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달여서 올렸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의로서 삼년상을 모셨다. 그 후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5년간을 머리를 빗기며 의복과 이불을 빨아 입히고 덮어 주었다. 상을 당하자 시아버지 때와 같게 하였다.불행이 겹쳐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옆에서 수발을 들었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게 기도하고 아침이면 초정약수를 길어다 미음을 끓여 간호하였다. 남편이 죽은후에도 자식들을 잘 키워 의로운 방향으로 교육을 시켰다.비석은 1975년에 세웠다. 비석의 전면에는 절효부초계변..
박봉임은 상주인 박용직의 딸로 인천인 채제홍의 부인이다. 남편이 20세에 일본으로 떠나간 뒤 극심힌 생활고에 4개면에 다니면서 일하여 시부모를 공경하였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가 노환으로 85세에 세상을 뜨자 그 애통함이 보는이를 놀라게 하였다. 초종례를 예를 맞추어 모셨다. 그 후 시어머니께서 노망이 들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자 자신도 70노경으로 매일 2-3회씩 시어머니 청결세탁을 담당하였다. 시어머니가 87세로 세상을 뜨자 초중례를 시아버지 때와 같게 하였다.비석은 단기 4308(서기 1975)년 을유년에 세웠다. 비석의 정면에는 효부박봉임기적비(孝婦朴鳳姙記蹟碑)라고 음기되어 있다.
새로운 문화시설로 잘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각종체험관과 함께 한옥체험등 볼거리와 더불어 임금님 수라상을 준비하는 공간인 수라간이 초정행궁에도 마련되어 있다. 현재는 코로나 19로 인해 운영하고 있지 않으나 추후 청주 전통조리서인 ‘반찬 등속’요리와 궁중요리 시식 체험, ‘반찬 등속’모형 전시 등 전통요리 관련 체험 프로그램이 이뤄질 예정이다. 또한 많은 문화공연등이 열리는 문화공간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초정약수는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초수(椒水)는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라고 ‘초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며,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
오영전(吳永田, 1866년 음력 12월 13일 ~ 1938)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관료이다. 출신지는 원적지인 충청북도 청주군 낭성면 삼산리 출신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한문을 수학했고, 한성부의 사립학교인 동아학관 법률경제과를 거친 뒤 1905년에 관리를 뽑는 문관전고시험에 합격하였다. 1905년에 농상공부 주사로 임명되면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농상공부 서기랑과 존봉도감 감조관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으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면서 충청북도 문의군 군수로 임명되어 재직했다. 문의군수로 재직 중이던 1913년에 정8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1914년의 대규모 인사 개편 때 문의군수직에서 면직되어, 총독부 관리로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다. 퇴관 후에는 청주군 북이면에서 북..
국가보훈처현충시설로서 이 비는 6.25 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한 북이면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고귀한 정신과 충절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습니다. 참전용사들의 지대한 공헌과 투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발전시켜 국가 번영을 이룩하는데 앞장섭시다. 관리번호 25-2-48로 북이면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