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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21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내수읍 도원리 태평재 담벼략에 있는 열녀강릉김씨의 비석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열녀유인강릉김씨지비㤠女孺人江陵金氏之碑라고 각인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강릉김씨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효부 강릉김씨(1911-1932)의 효열비로 1932년 도원리에 세웠습니다. 비문은 민영석이 짓고 글씨는 변숭인이 썼다. 강릉김씨는 김계선의 딸로 16세에 성산인 전병화에게 시집을 와 아내의 역할을 다하며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남편이 이름모를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되자 매일 밤마다 목욕하고 하늘에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일을 멈추질 않았다. 또한 한 겨울에도 병에 좋다는 약을 캐어 병수발을 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그러나 그러한 정성에도 남편이 병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자 강릉김씨는 22세의 나이로 남편을 ..
석화리(돌꼬지, 석화)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돌로 꽂이를 이루었으므로 돌꽂이 또는 석화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대리, 소롱리, 대길리의 각 일부와 산외삼면의 비 중리 일부 를 병합하여 석화리라 해서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날이 춥다. 요즈음은 차들이 다니지 않는 옛길을 따라 옛님들을 찾아본다. 빙판이 진 길이지만 천천히 몰며 좌우를 살피다 보면 만날수 있는 멋진 기회를 주는 님들이 있다. 석화리에서 만난 정려비도 또한 그렇다. 마을 끝언저리 야트막한 야산아래 시멘트 블럭담을 두르고 있다. 이곳 석화리는 경주이씨들의 집성촌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서있습니다. 큰 길이 생기기전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던 길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진사호송당이혼지처열녀안정나씨지려(..
내수읍 원통리에 자리하고 있는 죽림영당입니다. 죽림영당 옆으로는 여흥민씨들의 선대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죽림영당과 관련이 있는 여흥인 민광시의 묘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칠현갑회도는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있습니다. 1696년(숙종 22)에 통덕랑 이후직(李後稷, 1624∼1698), 변숙(1625∼1695), 좌승지 지성구(池聖龜, 1625∼1702), 신영식(申永植, 1625∼1694), 통덕랑 왕린(王潾, 1625∼?), 민광도(閔光道, 1625∼1713), 통덕랑 민광시(閔光時, 1626∼1696) 등의 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본래 북일면 입동리에 있었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에 재건하였고, 1978년 청주비행장 건설로 현재 위치인 원통리..
공자의 제자 민자건(閔子騫)의 후손인 민칭도(閔稱道)가 고려 중엽에 중국의 사신으로 상의국(尙衣局) 봉어(奉御)를 역임하고 여흥(驪興)[지금의 여주]에 정착함으로서 민씨(閔氏)의 시조가 되었다. 입향조는 18세손 민여개(閔汝漑)로 병자호란(1636)이 일어난 이듬해 서울에서 청원군 내수읍에 있는 입암공(立巖公) 민제인(閔齊仁)의 우거지였던 문지 선바위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서 세거지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중시조인 16세 감창공 민제영(閔齊英)의 맏아들 민사완(閔思完)은 청원군 내수읍 입동리에, 둘째 민사굉(閔思宏)은 미원면 북바위에, 셋째 민사건(閔思騫)은 흥덕구 신전동 추동(楸洞)을 각각 세거지로 삼고 번창하니 모두 300여 호의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 고장 12촌락을 민마루 열두동네[閔宗12洞]라 일컽..
내수읍 원통리에 자리한 여흥인 익지(益之) 민광시(閔光時, 1626-1696)의 묘소입니다.민광시(閔光時)는 조선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여흥이다.민건의 장남으로 자(字)는 익지(益之)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였다.을축생(1625년)동경(同庚:동갑)인 이후직(李後稷)등 일곱명은 36세 되던 현종1년(1660년)에 친목도모.학문정진.인격도야.향풍순화등을 목적으로 죽림갑계(竹林甲契)를 조직하였는 바 죽립갑게원중 한명이다. 현재 여흥민씨 재실에 배향(配享)되어있다. 통덕랑 민광시의 묘갈로 원통1리 묘소앞에 세웠다.부인은 공인안동김씨(恭人安東金氏)이다. 비문 전면에는 통덕랑민공광시지묘공인안동김씨부좌(通德郞閔公光時之墓恭人安東金氏祔左)라 쓰여있다.문인석과 동자석과 상석등을 갖추고 있다.후손들에 의하여 잘 관리되고 ..
민건(閔楗)은 조선중기의 인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민여개(閔汝漑)의 장남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였다. 고향집을 오고가며 가끔씩 시간이 될 때 마다 구길을 따라 차를 몰면서 지난것을 찾아보려고 둘러본다. 내수읍 원통리는 그중에 하나이다. 수확의 계절 가을인가 원통리 마을회관앞에 동리분들이 모여서 감수확에 박스포장이 한창이다. 원통리 지명의 유래는 源通里(원통이,원통)는 본래 청주군 북강내일면의 지역으로서, 원통사(源通寺)가 있었으므로 원통(源通) 또는 "원통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산리(台山里)와 내금리(內金里), 수내리(藪內里), 평촌리(坪村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원통리(源通里)라 해서 북일면(현 내수읍)에 편입되었다. 마을 뒷쪽으로 자리한 여흥민씨들의 선대묘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