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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내수읍 비상리 비상교회 뒷쪽길 마을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정절부순천박씨의 기적비입니다. 1977년 비상리에 세웠습니다. 비문은 연규복이 짓고 글씨는 임화형이 썼다. 비석의 전면에는 정절부순천박씨기적비(貞節婦順川朴氏紀蹟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순천박씨는 이름은 종순으로 박수규의 장녀이다.9세에 초계인 변명규에게 시집을 와서 시부모를 부모처럼 극진히 모시고 남편을 부도로서 내조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신 후 남편 또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니 부인 나이 18세였다. 실심하여 연일울며 지내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는 마음에 마음을 돌이켜 깨닫고 유복자 변종능을 낳아 낮으로는 밭을 일구고 밤으로는 길쌈을 하며 고생으로 양육하였다. 그리고 나이 40이 되기전에 손주를 보게되어 초년에 어려움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1997년(정축년)에 절효부 전주이씨(1887~1973)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비상리에 세운 효열비각입니다. 정면1간 측면1간의 겹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을 낮은 벽을 쌓은 뒤 홍살로 막고 안에는 1979년에 세운 절효부전주이씨비가 있다.비문은 1971년 최동겸이 짓고 글씨는 조수형이 썼다. 전주이씨(1887~1973)는 이승복의 장녀이다. 나이 10세에 아버지는 풍증으로 어머니는 해수로 고생하자 7년을 하루같이 간호하였다. 그러나 부모께서 연이어 세상을 떠나시니 가산이 탕진되어 남매가 표산하였다.전주이씨는 초계인 변형규에게 시집을 와서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남편을 부도로서 내조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병이 들자 부인은 10년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부인은 남편을 ..
내수읍 비상리 홍양사내에 있는 박선이,이춘금의 충노비입니다. 성종(成宗)22년(辛亥年,1491년)에 여진족이 5천의 대군으로 조산성(造山城)을 함락하고 경흥땅을 노략질 하자 나사종은 장졸들과 함께 적군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 32세의 젊은나이로 순절을 하였다.이 때 관기(官妓) 박선이와 아복(衙僕) 이춘금이 공의 흩어진 사지를 안고 울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이를 보고 경흥부민(慶興府民)들이 그 충절을 기린 내용을 새긴 비이다. 현재 홍양사(鴻陽祠)안에 있으며 안정나씨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박선이.이춘금충의비(朴善伊.李春金忠義碑)라고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只知有主 主殉幷殉 不知有身 烈哉兩人 라고 적혀있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오로지 주인만을 알고 주인이 죽으니 따라죽었네..
저곡리楮谷里(탁골,楮谷,골닥골)는 본래 청주군 산외일면의 지역으로서 닥이 많이 있으므로 닥골 또는 저곡(楮谷)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매평리(梅坪里)와 비중리(飛中里)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저곡리라 해서 북일면(현 내수읍)에 편입(編入)되였습니다. 청주시 내수읍 저곡리에 1990년에 세운 북암 이병수(北庵 李炳洙)의 사적비(事蹟碑)로서 비문은 성균관장 김경수(金敬洙)가 짓고 글씨는 평양(平壤) 조병호(趙柄鎬)가 썼다. 비석의 전면에는 북암전주이공사적비(北庵全州李公事蹟碑)라고 각인되어 있으며 옆에는 효자 이주업의 기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저곡리는 전주이씨의 집성촌입니다. 이병수(李炳洙 1883~1959)는 전주인으로서 자는 기화(奇化)요 호는 북암(北庵)이다. 선고(先考) 종원(..
조선 정조 11년(1787) 청주목 산외일면 비홍리(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 비홍마을)에 세워졌다. 도암(道巖) 변익하(卞益夏, 1683∼1717)는 부모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손가락을 잘라( 斷指注血)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으며, 시묘살이 중 음식을 거르며 슬퍼하다가 서른다섯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지금의 효자각은 1968년 중건한 것이며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에 낮은 벽을 쌓은 뒤 홍살로 막고 안에 편액을 걸었다. 초계변씨(草溪卞氏) 문중에서 관리한다. [卞益夏孝子閣]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효자처사변익하지문(孝子處士卞益夏之門)이라고 각자된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내수읍 저곡리로 접어들며 동네초입에 있는 효자 이주업의 기적비입니다. 저곡리는 완산이씨들의 집성촌입니다. 이주업(1909~1970)은 완산인으로 호는 효당이며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새로 의성김씨를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우연히 병을 얻자 이주업은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시탕하며 효성을 다하였다. 특히 이주업은 단지하여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주어 (단지주혈)어머니의 수명을 수개월 더 연장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효성에도 어머니가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초종범절의 예의를 갖추어 행하는 한편 시묘살이 3년을 옛사람과 같이 하였다. 그 후 아버지 또한 노환으로 고생을 하자 아내와 함께 정성을 다하여 병구완을 해드렸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나니 3년 시묘생활을 어머니때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