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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10/08 (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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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3리 용곡마을에 있는 고창인 오수탁의 송덕비입니다. 비석에는 죽암거사오수탁송덕비(竹庵居士吳洙鐸頌德碑)라고 적혀있으며 매사에 헌신적으로 일했으며 성품이 인자했으며 오랜기간동안 동네일을 맡아 공적인 일을 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쫒지않았고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니 부락이 항상 평온하였다.빗돌에 그 공을 새겨 영원토록 기억하리라. 비석은 부락민 일동으로 경술(庚戌) 7월에 세웠습니다. 경술년이면 1910,1970년인데 비석등의 상태로 보아 1910년으로 추정됩니다. 금암리는 동이면 중앙에 위치하며 면적은 4.76㎢이다. 동쪽은 조령리와 청마리 남부, 남쪽은 적하리, 서쪽은 평산리와 지양리 남부, 북쪽은 지양리 북부와 청마리 중부에 접한다. 원래 금암리는 1757년 『여지도서』와 1830년대 『옥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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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면 도농리 도성마을 입구에 있는 전주이씨효열비입니다. 염달성廉達成의 처 전주이씨(全州李氏, 19세기 말엽)의 효열비입니다. 전주이씨는 안남면 지수리에 사는 이학성李學成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에 안남면 도농리 파주염씨坡州廉氏 집안에 시집 온 후,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며 따랐다. 그러나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워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많았는데, 온 식구들을 우선 먹게 하고 본인은 굶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에도 그녀는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품을 팔아서 온 식구를 먹여 살렸다. 당시 시부모, 그녀와 남편, 시동생들까지 모두 열 명 이나 되는 식구가 한 집에서 살았는데,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식구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병에 걸려 눕게 되자, 좋다는 약을 백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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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유원(郭綏元, 14세기 말엽)은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고려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으며, 선산곽씨가 옥천에서 대족이 된 것은 모두 곽유원郭綏元에게서 시작 하였다. 그의 묘소는 옥천 적등강赤登江가의 이원면 백지리에 있으며, 곽순郭珣, 곽규郭珪, 생원生員 곽기郭琦 등 세 아들을 두었다.(옥천군지) 이름이 곽수원과 곽유원으로 달리 기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옥천군지만 해도 두개의 이름을 혼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산곽씨 대종친회 사이트를 보니 곽유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고려중정대부삼사좌윤선산곽공휘유원유허비(高麗中正大夫三司左尹善山郭公諱綏元遺墟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비의 설립내력을 적어 놓았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서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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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면 도농리에 있는 하동정씨세거비(河東鄭氏世居碑)입니다. 농막마을과 되재마을 갈라지는 다리 옆에 서있습니다.도농1리는 농막, 도성, 황촌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부터 250여 년 전에는 농막리라 하였다. 농막農幕은 세종 때 문신인 홍문관 부제학 전지全智가 문종 승하 후에 안남 도농리에 낙향하여 농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의 호를 농막촌農幕村이라 불러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 뒷산 용바위에서 개울물이 흘러내리는 광경이 흡사 용트림과 비슷하다 하여 용계라고 부르다가 농막을 짓고 살았다는 연유로 농막으로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은 농막, 되재(도성), 황촌黃村 3개 마을이 있다. 농막에는 하동정씨와 배천조씨가 세거하며 마을 앞에 하동정씨 세거비가 있다. 도성은 처음 인동장씨가 정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