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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1 (4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원면 기암리 압실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입니다. 선돌은 서로 길을 보고 마주 서있었지만 건물신축등의 이유로 나무밑에 같이 세워져 있습니다. 선돌은 선사 시대에, 자연석이나 약간 다듬은 돌기둥을 땅 위에 하나 또는 여러 개를 세운 거석(巨石) 기념물. 2~3미터에서 10미터에 달하는 높이로 족장의 위력을 나타내거나 돌에 대한 원시적 신앙의 대상물 또는 묘비나 지역 경계의 표지로서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암리 선돌은 마을과 주민들의 안녕을 비는 일종의 액막이 개념으로 세워진 민간신앙의 결과물이다. 기암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일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암리, 구마리, 구마평리, 항동, 구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기산과 구암의 이름을 따서 기암리라 하였다. 거리고개(기..
이 옥개석은 1975년 청주시 석교동에서 전화회선을 까는 작업을 하던 도중 발견 되었으며 석등의 상,중,하대및 상륜부분을 찾지 못한 체 옥개석만 현재의 충북대학교 박물관 야외전시장 자리로 이건하였다. 개석을 드물게 보이는 12각형으로 글자가 2자 새겨져있으며 중심부는 석등과 연결할 수 있도록 구멍이 뚫어져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충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있는 안태고향이 강서동 부모산인 미륵입니다.미륵이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된 마이트리야(Maitreya)의 음역이다. 중국식으로 옮기면 자씨(慈氏)보살이지만 본래의 뜻은 구원의 불이다. 미륵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 바라문의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아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그 뒤 도솔천에 올라가 지금까지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민긴신앙의 대상으로 세워졌던 석상으로 미륵 또는 장승등의 명칭으로 불리웠다.얼굴이나 신체의 형상을 간략하게묘사 하였다.부모산 미륵은 미마에 백호도 있으며 근엄한 모습과 더불어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충북대학교 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그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미원면 수산리에 있는 남양홍문 사당인 남양사 입구에 있는 효자 홍순영을 기리기 위하여 홍순모(洪淳模)가 서하고 조봉이 선하여 세운 비석이다. 대석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개석을 올린 일반형 비석입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입니다.
운수정과 관련된 인물은 신경행이다. 신경행(辛景行: 1547∼1618)은 본관이 영산(靈山)이다. 자는 백도(伯道)고, 호는 조은(釣隱)이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조선 선조 6년(1573) 사마시에 합격했고, 선조 10년(1577)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이 공으로 선조 26년(1593) 한산군수(韓山郡守)가 되었다.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學)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공주목사(公州牧使)ㆍ서흥부사(瑞興府使)ㆍ장흥부사(長興府使)ㆍ병조참의(兵曹參議)ㆍ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ㆍ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으며, 선조 41년(1608)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
신강면은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청안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충청북도 괴산(槐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박내명(朴來明)·신강면(辛康勉)·장성원(張聖源)과 함께 1919년 3월 30일 청안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 도중 주동자들 여러 명이 연행되자 분노한 군중들과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경찰들의 무차별한 발포로 군중들은 해산되었고, 그는 이 과정에서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1919년 10월 11일 소요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