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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1 (4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원래 시목리에 있던 충신문인데 이곳으로 이건하였습니다. 이 충신각은 조선 숙종 1년(1675)에 병자호란 당시 고원군수(高原郡守)로서 청나라 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증직된 보성인(寶城人) 오대남(吳大男, 1597∼1637)의 충절을 기리어 나라에서 세운 정려이다.현도면은 보성오씨들의 유적이 참 많다 .시목리를 비롯 달계리와 양지리 중삼리등에 보성오씨들의 충신문,효자문,열녀비등이 즐비하다. 오대남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공주로 몽진하는 어가를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워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제수되었으나 왕세자를 강도(江都)로 호종하여 싸우다 순절하였다.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지선정 뜰앞에 자리하고 있는 강고사원정비 입니다. 강고사는 1932년에 보성오씨(寶城吳氏) 문중에서 진사 지선정(止善亭) 오명립(吳名立, 1563∼1633)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971년에 노봉서원(魯峰書院)에 배향되었던 문헌공(文憲公) 대사헌(大司憲) 규암(圭庵) 송인수( 1487∼1547)와 포천현감(抱川縣監) 북창(北窓) 정렴(鄭廉, 1506∼1549)을 추향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68년에 중건하고 1971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과 좌우에 쪽문을 달았으며 강고사(江皐祠)라는 편액을 걸었고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현도면 하석리 노봉서원 터를 찾기위해 길을 가는 중에 만난 순흥안씨세천비 입니다. 현도면 하석리 저수지 쪽으로 너머가면 노산리에 순흥안씨 양공공파의 묘역과 함께 재실이 있습니다. 순흥안씨세천(順興安氏世阡)이라는 글이 각자 되어 있습니다. 하석리(아래석천)는 영조후반에 석천 아래쪽이라는 의미로 하석리라 하였고, 본래 문의군 일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군 현도면에 편입되었다. 노봉서원터는 하석리 맨 꼭대기에 있는 마을로 밀양박씨와 이천서씨가 누대로 대성을 이루며 살았다.
지선정(止善亭)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2년(1610)에 지선(止善) 오명립(吳名立 , 1563∼1633)이 세운 정자로서 오명립의 호를 따서 지선정이라 하였다. 지금의 정자는 고종 16년(1879)에 중건하고 1932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에 2단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안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詩烈)이 쓴 충효일생 와차강분(忠孝一生 臥此江 )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밖에는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가 쓴 지선정(止善亭)이란 편액을 달았다. 지선정은 서쪽에 인접하여 작은 내가 흐르고 주변의 벌판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져 경관이 수려하며,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서당의 기능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층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11호로 ..
새벽녁 길 잃은 빗님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는 듯 마는 듯. 그냥 지나치기에는 조금 거스르지만 어깨위에 기척을 주며 같이 걷자고 이야기 한다. 그럴까? 따뜻한 잠자리의 마지막 유혹을 털고 일어나 어깨 가리는 작은 우산쓰고 길 잃은 빗님과 동행 해본다. 계절은 조금씩 변화를 주며 다가오건만 내 마음은 아직도 변화를 두려워하며 한겨울 한가운데 고장난시계처럼 멈춰있다. 빗님 반가운 아침이다.
노봉서원은 광해군2년(1610)에 오시립(吳時立), 오유립(吳裕立), 오명립(吳名立), 보성오씨 일문과 정렴(鄭磏)의 처갓집 자손인 유흥림(柳興霖)이 송인수와 정렴(鄭磏)을 모시기 위해 구룡산 자락 노봉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광해군7년(1615)에 완공하고 청액소(請額疎)를 올려 효종9년(1658)에 허락을 받아 현종3년(1662)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을 내림, 즉 국가 공인 서원)받았다. 1694년(숙종20) 송준길(宋浚吉, 1706년 검담서원으로 옮김),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 1725년(영조1) 권상하(權尙夏)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송준길은 부용면 검시에 검담서원을 지어서 빠져 나갔다. 오시립, 송시열, 권상하가 원장을 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