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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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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장남원양공기석송덕비(前面長南原梁公箕錫頌德碑)라고 음각되여 육인수송덕비와 함께 회남면주민자치센타앞에 있다. 1961년회남초등학교 입구에 세웠던 비로 대청댐 담수로 학교와 함께 1980년에 이전하였다. 비의 상태와 관리 상태는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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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면 병암리에 있는 김원근의 진휼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김원근진휼비(金元根賑恤碑)라고 각자되었습니다. 길 건너편 성요셉묘지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던것을 길 건너편으로 이건하였습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1935년이며 그의 구제에 헤택을 입은 동리 주민들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김원근은 교육가이며 자선사업가로 1906년의 수재민 구호사업을 시작으로 1925년에는 조치원 및 연기 서면의 기근자 약 7,500여명을 구휼하였고, 1929년에는 청원군 남일면 두산리의 하천부지 6만평을 개간하여 844호의 농민들을 안착시킴은 물론 쌀 540가마를 단독으로 구입하여 3개 면의 재민 구제 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5년과 1939년에도 청주 및 청주 인근의 흉작 기근민 구제에 앞장섰다. 1945년 광복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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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면사무소에서 속리산쪽으로 가다보면 속리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오른쪽 평지의 농토자리가 보은집회가 열렸던 동학취회소 이다. 백이십여년 전,이 곳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모여든 민초들로 넘쳐났다. 이런 산간벽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면, “한양의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궁벽하던 산골 장안에는 도소가 차려지고 이를 중심으로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기거할 초막들이 언덕배기마다 골짜기마다 즐비하게 지어졌다. 끼니 때가 되면 골골이 초막에선 밥 짓는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동학교도들은 낮이면 취 회에 참석해 새로운 세상을 모색하며 다가올 미래를 꿈꾸고, 저녁이면 호롱을 밝히고 경전을 읽었다. 장안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이제껏 꿈 꿔 오던 그런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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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高麗忠臣鄭夢周之閭(고려충신정몽주지비)’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 송국헌은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군식(君式), 호는 안소당(安素堂)이다. 청주(淸州)출신으로 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송남수(宋柟壽)이고,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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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곡3리 우레실 마을은 예전에 마을 뒷산에 두견새가 울었다고 하는데서 빌려온 이름이다.. ‘우뢰실’이 변하여 ‘우레실’이 된 것이다. 용곡3리 우레실은 용머리에서 호점산성 방향으로 올라야 볼 수 있다. 쇠푼이 만큼 골이 깊다. 산 밑에 올망졸망 자리 잡은 마을 앞에 다랑이 논이 있어 쇠푼이 보다는 조금은 넓어 보였다. 전형적인 산촌마을 풍경이었다. 마을 입구 길옆 돌탑에서는 정월 11일부터 5일간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마침 정월대보름이 코앞이라 제사 준비를 위해 우레실 터줏대감인 어르신이 청소에 열중 하고 계셨다. 요즘에는 5일간 기도는 올리지 못하고, 정월 14일 아침 마을 샘을 퍼내고 저녁에는 탑재를 지내며 저녁에는 마을 뒷산에 올라 산재를 지낸다고 한다 [보은군지] 마을 앞산에는 호점산성이 자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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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곡1리 용머리는 회인천을 지나 만나는 첫 마을이다. 현재 12집이 살아 가고 있는데, 예전에는 큰 마을이었다. 북쪽으로 성거리마을, 동쪽으로는 양짓말이 있고, 남쪽에는 주막거리마을이 있었는데 대청댐 담수로 사라져 버렸다. 서쪽으로 샘골마을과 중뜸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의 용머리 마을이 되었다. 1980년대에 대청댐이 건설되어 새들이라는 좋은 농토가 전부 수몰되었다. 한때 는 40여 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마을이었는데 정겹게 살던 주민들이 하나둘 고향 을 떠나 조금은 쓸쓸한 마을이 되었다. 마을 중앙에는 회인서당이 있는데, 예전 회룡초교를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 있다. 회룡초등학교는 1963년 회인국민학교 용곡분교장 인가, 1967년 회룡국민학교 인가를 시작으로 1982년 회인국민학교로 통합하기까지 인근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