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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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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리 마을회관을 지을 때 부지가 없어서 일의 추진이 어려워 지자 자신의 토지를 희사하여 마을회관을 지을수 있도록 토지를 희사한 경주인 이재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1985년 동리주민들에 의하여 마을회관 입구에 송적비를 세웠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경주이공재덕송적비(慶州李公在德頌蹟碑)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이재덕이 희사한 토지의 평수등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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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당(溪堂)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최흥림(崔興霖, 1506~1581)이 낙향해 은거하며 공부했던 건물이다. 최흥림의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현좌(賢佐), 호는 계당(溪堂)이다. 최흥림은 명종 1년(1545)에 을사사화로 많은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보은으로 낙향하여 줄곧 이곳에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성운(成運), 조식(曺植), 성제원(成悌元)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이곳은 순조 15년(1815)에 금화서원이 창건되자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종도리(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장여(도리 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길고 모진 나무)에 “단기 사삼십오년 임술 팔월 십칠일 기미 미시 입주상량 술좌(檀紀四三十五年壬戌八月十七日己未未時立柱上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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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리의 이천계를 모신 백봉사를 찾으니 백봉사를 새로 수리를 하느라 천막을 둘러놓아 백봉사는 볼수가 없었다. 그 옆에 자리한 이천계의 묘갈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천계(李天啓)는 1507(중종 2)~1550(명종 5)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형백(亨伯), 호는 괴당(槐堂)이다. 처음 보은에 입향한 군기소감(軍器少監) 이사언 (李士彦)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이문중(李文忠), 아버지는 부장(部將) 이철권(李鐵拳),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영의정에 증직된 한증(韓曾)의 딸이다. 부인은 강진 김씨(康津金氏)로 김윤선(金潤璿)의 딸이다. 보은읍 이평리에서 출생 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영의정 한효원(韓效元)에게 배웠다. 1537년(중종 32) 식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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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금굴1리에는 일제 강점기인 1931년부터 1936년까지 보은군수를 지낸 최재익의 선정비가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조선총독부 보은군수 최재익이 선정을 베풀었다는 내용입니다. 최재익의 선정비 뒤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자선가인 금굴리 출신 안종건의 진휼비도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재익은 조선총독부 보은군수로 부임하기 이전인 1930년 단양군수를 지냈고 1936년에는 충북 제천군수를 지냈습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최재익은 친일관료 명단에 올라있습니다. 도로가 넓어지고 새로 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은 사람의 왕래가 뜸한 자리에 서있습니다. 특이하게도 후세에 그리 새긴것인지 앞면과 뒷면에 모두 글씨를 음각하여 놓았습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소화12년(1937년) 보은군수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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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훈(尹鼎勳)은 1881. 11. 24.~1921. 7. 7. │ 자(字)는 옥현(玉鉉), 호(號)는 국은(菊隱)으로 내북면(內北面) 서지리(西枝里) 168-6번지(현 터골길 33)에 거주하였다. 고종의 국장 장례에 내북면 서지리 대표로 상경하여 참례하고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3・1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후 3・ 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보은지역에서는 4월에 이르러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8일에 보은지역에 최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내북면 서지리(西枝里, 터골길)에서 윤정훈(尹鼎勳)과 구열조(具悅祖), 산성리(山城里, 현 보은읍 산성리 잣미길)에서 이용기(李龍基)가 각각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산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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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건(安鍾健) 1885(고종22)~1951 │ 근·현대의 독지가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보은읍 금굴리에 살았다. 타고난 품성이 순후하고, 부모님을 봉양함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또한, 손님 접대의 공손함이 널리 알려졌다. 흉년이나 춘궁기가 되면 빈민을 위해 구휼에 힘쓰니 그 혜택을 입은 사람이 만 명이 넘는다 하였다. 그의 송덕을 기리기 위해 1925년 보은읍, 금굴리, 지산리, 수한면 후평리 등지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참봉안종건진휼기념비(參奉安鍾健賑恤紀念碑)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의 위치는 새로운 도로등이 개통되면서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석의 주위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종건 진휼기념비 앞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보은군수를 지낸 최재익의 선정비가 자리하고 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