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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안남면 도농2리 소야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정자를 끼고 좌측으로 길을 내려가다보면 우측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병렬庾秉烈의 처 경주이씨(慶州李氏, 19세기 말엽)의 비석입니다. 경주이씨는 나이 18세에 무송유씨茂松庾氏 집안 유병렬에게 시집 와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남편을 위해 성실히 내조하였다. 그녀의 시아버지가 평소 술을 좋아하였는데, 그녀는 비록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항상 술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준비하였다가 올렸다. 그런데 그녀의 시아버지는 혼자 술을 마시는 법이 없어 항상 이웃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그녀는 이때마다 귀찮은 내색을 하거나 대접에 소홀함이 없이 정성껏 대접을 하였다. 이에 시아버지 친구들은 언제나 부담 없이 찾아와 따뜻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자..
자는 사정士正, 호는 애일당愛日堂,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할아버지는 민광경閔光炅, 아버지는 민덕중閔德重이며 어머니는 성하적成夏績의 딸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어릴 적부터 천성이 어질고 검소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상제 노릇을 마치 어른과 같이 하였으며, 끝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의 명에 따라 우암 송시열 문하 에서 수업하였으며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 두었다가 늦게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1720 년(숙종 36)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승진하고, 1721년(경종 원년)에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나아갔다. 1725년(영조 원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제수받고, 곧이어 종묘서령宗..
도농1리는 도농리 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안내면 오덕리, 남쪽은 도농2리 소야, 서쪽은 화학2리 수일, 북쪽은 안내면 오덕리와 접한다. 도농1리는 농막, 도성, 황촌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부터 250여 년 전에는 농막리라 하였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도성과 농막을 합하여 도성의 도道 자와 농막의 농農 자를 붙여서 도농리라 부르게 되었다. 도성道城은 마을 뒷산(해발 425m)에 삼국시대 조천성 성터가 있어 성재라 부르다가 되재로 변화하고, 이를 한자화하여 도성이라 불렀다. 농막農幕은 세종 때 문신인 홍문관 부제학 전지全智가 문종 승하 후에 안남 도농리에 낙향하여 농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의 호를 농막촌農幕村이라 불러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 뒷산 용바위에서 개울물..
방하목리는 안내면 북부에 위치한 산촌마을이다. 동쪽으로 북대리, 남쪽은 서대리, 서쪽은 월외리, 북쪽은 6번 군도와 보은군 수한면 질신리가 연결된다. 면적은 3.29㎢이다. 옥천군 최북단의 두메산골 마을이다. 보은군 수한면 질신리와 월경마을이 경계를 이룬다. 방하목리는 1830년대 발행된 『옥천읍지』에 안내면 관할이며 옥천 관문에서 동쪽으로 거리가 40리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방하목리라 부른다. 방하목리는 옥천군 최북단 오지마을로 예부터 피난지였다. 두 개의 하천이 이 마을 앞에서 하나로 합쳐 흐르는 모양이 디딜방아처럼 생겨 한자음인 방하목리方下目里로 음차하여 부르게 되었다. 행정리로는 방하목리 하나이며, 자연마을은 정구지밭골, 서낭재, 북쪽에는 보은과 경계지인 월경마을, 방하목 등 4개 ..
안내면 용촌리 용촌국민학교 뒷쪽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인 김달호의 공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안동김공달호공적비(安東金公達鎬功蹟碑)라고 적혀있으며 뒷 쪽에는 김달호의 학교를 위한 공적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석은 학부형 일동이름으로 하여 1979년에 세웠습니다. 용촌리의 솔메기에는 각종 민속자료가 많이 전시된 가산박물관이 있다. 밤티마을 입구에는 의병장 조헌선생과 관련된 우물이 보존되어 있고 조금 더 산으로 올라가면 조헌 선생께서 거쳐하며 공부하던 후율정사(後栗精舍)터가 당골에 있다. 1965년 3월 7일 개교한 용촌초등학교는 1995년 3월 1일 학생수의 급감으로 폐교를 하였다. 또한 중봉선생이 임진왜란 전에 하늘을 보고 천기를 읽으며 소요하던 유상지석(관천석)이 학교 뒷편 마을 안에 위치해 있어 ..
지금은 폐교된 용촌국민학교 뒷쪽 언덕에 있는 용촌국민학교 교장을 지낸 유무현선생의 공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교장유무현공적비(校長庾務鉉功績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공적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유무현교장은 용촌국민학교 6대 교장을 지냈으며 학교발전과 더불어 동네주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보건진료소를 유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비석은 1985년에 학구주민일동의 이름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지명유래는 용촌리를 흐르는 가산천에 깊은 용소龍沼가 있어 그에 연유하여 용소말이라 불러서 마을 이름을 용촌리龍村里라 하였다. 용소말을 용수말로 부른다.용촌리 단일이며 자연마을은 용수말, 새터말(신대), 도래밤티, 솔맥이가 있고 문화유적으로 조헌이 천기를 보았던 유상지석과 중봉약수, 후율정사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