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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삼남리는 청성면 남부 중앙에 위치한 고지대 마을로 남쪽 방면에서 청성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 요지이다. 면적은 4.99㎢,이다. 동쪽은 영동군 용산면과 소서리, 서쪽은 양저리와 묘금리, 남쪽은 조천리, 북쪽은 장수리와 궁촌리와 인접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여지도서』 기록에 청산현 남면 조분리에 속하였고, 대한제국 때 청산군 남면 조분리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산군을 옥천군에 통합시키고 삼거동三巨洞과 차남리車南里를 합쳐 처음 삼남리三南里를 신설하고 옥천군 청남면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929년 청성면에 편입하였다. 삼남리는 삼거리와 차남리를 합할때 삼거리의 석삼三 자와 차남리의 남녘 남南 자를 한자씩 따서 삼남리라고 하였다. 삼남리 마을표지석이 보이는 길 건너편에..
청성면 합금리 하금에 있는 밀양인 박봉하의 공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밀양박공봉하공적비(密陽朴公奉夏功績碑)라고 적혀있으며 마을보건진료소를 지을 때 땅이 없어서 공사가 난항에 부딪힐 때 선뜻 나서서 자신의 땅을 희사한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주민일동의 이름으로 1988년 3월1일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하금리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남면 도농리에 있는 청송심씨열녀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청송심씨열녀비(靑松沈氏㤠女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국한문 혼용하여 청송심씨의 열녀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비석은 1988년에 세워졌습니다. 열녀 심창섭(沈昌燮)씨는 보은 탄부 석화리에서 태어나 6남매중 장녀로 곱게 자라다가 15세 나이에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정희옥씨에게 출가하여 10여 개월 남짓하게 살다가 부군이 16세의 어린나이로 1908년 1월6일에 타계하니 심창섭은 16세 청춘에 과부가 되였다. 천지가 암담하고 억잠이 무너지며 기절초풍할 일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남편의 장사를 치른 후 시부모님들을 위로하고 친부모를 의지하며 살던중에 먼친척인 소룡씨를 시아버지 정병순씨께로 양자하여 3년만에 아들을 얻으니 그 아이를 양자하여 아들..
안남면 도농2리 소야마을에 있는 시혜비입니다. 시혜비의 전면에는 주사유재신시혜비(主事庾載信施惠碑)라고 적혀 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임술년(壬戌年) 서기 1922년 입니다. 정자에 앉아 계신 동네 어르신들에게 문의를 하니 일제강점기때 동네에 유지였던 유재신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합니다 비석의 상태로 보아 원 비석은 아닌 듯 합니다. 원비석의 훼손등 으로 새로 비석을 개립한 듯 합니다. 도농2리 소야는 삼국시대부터 있던 오래된 마을이다. 또 청성으로 넘는 마을 고개의 모 양이 소가 짐을 싣는 길마와 같다 하여 고개 이름을 길마재라 하였다. 이처럼 마을이 소가 누워 있는 들판 모양의 와우臥牛형 들이라 하여 우야牛野라는 한자어가 변화되어 한자어인 소야蘇野가 되었다. 주요 성씨는 무송유씨 집성촌이 있으며 ..
농막마을에서 내려오는 길에 왼쪽으로 서 있는 세거지지비 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하동정씨세거지지(河東鄭氏世居之地)라고 써있으며 농막(農幕) 도성(道城)이라고 한자로 써있습니다.
동이면 금암3리 용곡마을에 있는 고창인 오수탁의 송덕비입니다. 비석에는 죽암거사오수탁송덕비(竹庵居士吳洙鐸頌德碑)라고 적혀있으며 매사에 헌신적으로 일했으며 성품이 인자했으며 오랜기간동안 동네일을 맡아 공적인 일을 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쫒지않았고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니 부락이 항상 평온하였다.빗돌에 그 공을 새겨 영원토록 기억하리라. 비석은 부락민 일동으로 경술(庚戌) 7월에 세웠습니다. 경술년이면 1910,1970년인데 비석등의 상태로 보아 1910년으로 추정됩니다. 금암리는 동이면 중앙에 위치하며 면적은 4.76㎢이다. 동쪽은 조령리와 청마리 남부, 남쪽은 적하리, 서쪽은 평산리와 지양리 남부, 북쪽은 지양리 북부와 청마리 중부에 접한다. 원래 금암리는 1757년 『여지도서』와 1830년대 『옥천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