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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92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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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황곡은 칠성면 비동리에 속하는 동리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가는 입구 밭 한편에 발황곡(發晃谷)이라는 돌비가 세워져 있으며 고파라암지(古疲羅庵址)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파라암이라는 암자가 있던 마을로 추측이 됩니다.자연암석위에 대석을 끼워 맞추고 비신을 세웠습니다. 발황곡이 있는 산이름은 모산으로 옛날에는 바라암(파라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바라암골이 바람골 또는 바랑골로 불리우다가 그 곳에 마을이 생기면서 한자로 표기하며 발황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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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기선생은 독립운동가. 문광면에서 1875년 9월 20일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운개(雲璂)·운기(雲騏)이다. 1913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순필(姜順必)·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그는 풍기광복단에서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 및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1914년 보은면장(報恩面長) 박창빈(朴昌彬)으로부터 권총 10정을 제공받아 김재성(金在性)에게 주고 친일파 박영효(朴泳孝) 암살 계획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김재성은 암살 계획 시행 직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체포되었고, 정운기 또한 공범으로 징역 5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인 1915년 풍기광복단이 ‘조선국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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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忠莊祠)는 괴산군 칠성면 두천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인 창산군(昌山君) 성대훈(成大勳, 1572~1636)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636년(인조 14) 건립되었는데, 1910년 칠성면 송동리로 옮겼다가 1980년 다시 두천리로 옮겨 중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목조기와집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둘레에는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러놓았다. 성대훈은 자 중집(仲集)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고 1623년 인조반정 후 평양별장(平壤別將)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군을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창산군에 봉해졌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크게 활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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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9일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1769년(영조45년)에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의성김씨 16세 김전(金巓)의 사우로 세워졌으며, 중종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서당의 역할도 함께 하여 ‘백운서당(白雲書堂)’이라고도 부른다. 외사리 마을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의성김씨 종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조선 영조(英祖)45년(1769)에 처음 세웠던 것인데 1915년 중수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중앙에 대청마루를 설치하고, 오른쪽과 왼쪽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방문은 붙박이로 하였다. 건물 앞에는 옛모습을 간직한 솟을삼문이 서 있고, 대문 밖에는 괴강(槐江)이 흐른다. 방문하던날이 마침 봉서재를 해체하여 다시 보수공사를 하는날이었다 기와며 사용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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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물면 광전리 광지실에 있는 함양인 박현종의 정효비입니다 광전리 광지실은 함양박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대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을보호수 아래 막돌로 담을 쌓아 정려문안에는 근간에 세운 정효비와 함께 편액이 걸려있으며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박현종(朴顯鍾) 1767(영조 43)~ 자는 사심(士心), 호는 어우당(於于堂), 본관은 함양으로 통덕랑(通德郞) 박순화(朴淳和)의 아들이다.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읜 후 그 얼굴을 모르는 것을 항상 안타까워하면서 어머니 없는 아이를 보면 눈물을 흘리고, 부모가 모두 있는 사람을 보면 스스로 상심하였다.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으나 부지런히 노력하여 아버지가 좋아하시는것을 갖추기에 힘썼다. 또 간혹 별미(別味)를 얻으면 반드시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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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택 선생은 독립운동가 입니다. 중원군 상모면(上芼面) 수회리에서 1890년 9월 27일출생하였다.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지산(志山)이다. 1903년 불정면(佛頂面) 지장리로 선산을 따라 이주하였다. 1910년 대종교(大淙敎)에 봉교(奉敎)하였고, 1911년 북간도(北間道)로 망명하여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중국 청도에 도착하였다. 이후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8월 계상중학교와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하였다. 상해조계 국제탐정 일경에 연행, 문초를 받기도 하였고, 1915년 안중근 전단 배포사건으로 일본영사관 탐정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대한독립의용부를 조직하여 서무주장을 맡았으며, 선언문 작성에도 가담, 1918년 3월에 세계 각국에 밀송하고 파리평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