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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4 (5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이름도 이뻐라. "이목리 새마을빨래터" 동네의 아침을 열며 저녁을 마무리 했던 빨래터. 동네아낙들 옹기종기 모여앉아 투닥투닥 방망이질 하던 곳. 술먹고 늦게 들어오는 신랑 한대. 아침쌀 적게 내주는 시어머니 한대. 이 설움 저설움 아우르며 빨래터에 소리는 높아졌었지. 지금은 그 시절 간곳 없고 가끔씩 들리며 추억을 생각하는데 이목리새마을빨래터 명판위로 그리움이 둥지를 튼다.

관정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 지역으로 조선 영조 후반(1750-1776) 관기리 묵정리가 새로이 조성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묵정. 관기 호산. 감당. 호동 으로 이루어저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감당리를 미원면 성대리 호동의 일부를 호정리로 넘겨 주고 관기리와 묵정리의 이름을 따서 관정리라 하였으며, 활뫼,담안. 재실을 1리로 머그미.장자불. 절골을 2리로 분구 하였다. 활뫼(活山) : 관정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며, 1956년 이전에 琅城面事務所 있던 마을 관터(官基) : 활산 앞에 있는 마을로 백제때 娘臂城의 고을터라 함. 재실 : 활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경주김씨 재실이 있음. 담안 : 재실 동쪽에 있는 마을 칠여골 : 활산 북쪽에 있는 마을 묵정(墨井) : 머그미. 먹..

삼산리는 면 최북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은 갈산리, 서쪽은 현암리와 청주시 산성동, 북 쪽은 내수읍에 접해 있는 산촌 마을이다. 삼산리는 청주군 산내이하면의 지역으로 상당산. 인경산. 태봉산이 둘러쌓여 三山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부를 갈산리에 넘겨주고, 화문동을 병합 하여 랑성면에 편입되었으며, 1936년 둔병이를 2리로 분구 하였다. 중간말 : 마을 중앙에 있는 마을(옛날에 洞閣이 있었음.) 새말 : 중간말 동쪽에 있는 마을. 도란말 : 중간말 서쪽에 있는 마을. 마을을 들어갈 때 산모퉁이를 돌아서 간다고 도란말이라 한다. 솟두백이 : 중간말 북쪽에 있는 마을. 마을 수호신의 표상인 솟대가 있었다고 한다. 탑산리 : 중간말 북쪽 솟두백이 지나서 잇는 마을(산높낮이가 탑을 쌓아..

낭성면 삼산리 삼산2구 마을입구에 있는 개문동성적비 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개문동성적비(開門洞聖蹟碑)라고 씌여 있으며 후면에는 그 내력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석 후면에 기술된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삼산리는 원래 두문동이었다. 그러나 개도 72년(서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개문동이라 하였으니 이는 금강대도 제 2세인 이청학 도성사부께서 당시 왜정의 탄압하에 이 곳 36번지인 최동식의 집에 100일간 은둔하면서 비밀리에 민족정기를 함양하고 흥기도덕가와 봄노래를 지으면서 천운이 회태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8.15광복과 더불어 이 곳을 떠나시면서 "내가 이제까지 문을 닫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문을 열고 살게 하리라"하신 후 부터는 자연적으로 개문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므..

현암리는 면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삼산리와 갈산리, 남쪽은 무성리, 서 쪽은 청주시 월오동, 북쪽은 산성동과 접해 있다. 가구는 52호에 인구는 155명이다. 현암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하면 지역으로 조선 영조후반(1750-1776)에는 현암리와 죽 동리로 이루어저 있다가 정조 22년(1789년경)에 양성리가 조성되었고, 헌종 때(1845 년경) 죽동리가 거죽리와 죽동으로 분리되었 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죽동과 거죽리가 통합되어 거죽리로, 양성리는 양지리로 변경되어 현암. 차남. 거죽리. 양지리로 이루어저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거죽리와 양지 일부를 산성동으로 넘겨주고 마을입구에 검은 바위가 두개 있으므로 현암이라 하여 랑성면에 편입 되었다. 검배(玄岩) : 현암리..

갈산리에서 현암리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사천목씨청은공 묘역비석입니다. 산 쪽으로 길을 따라 500여 미터 접근하면 사천목씨 청은공 묘역이 있습니다. 목씨(睦氏)의 유래는 문헌상의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예전부터 ‘형제상목설(兄弟相睦說)’과 ‘당학사동래설(唐學士東來說)’이 전해져 왔다. 옛날 경남 사천(泗川) 지방에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의 우애가 어찌나 깊었던지 그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는 나라에서까지 이 소문을 듣고 그 지극한 형제애를 표창하기 위해서 ‘화목’을 뜻하는 ‘睦’자를 성(姓)으로 내렸다는 것이 ‘형제상목설’의 줄거리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목씨 성은 사회적 덕행자 표창 차원에서 국가[고려]에서 내려 준 사성(賜姓)이라는 것이다. ‘당학사동래설’은 고구려 28대 영류왕618~642)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