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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8 (6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강릉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강릉부사 이응우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석의 크기는 가로 46.2 세로116 두께13센티이며 비석의 전면에는 부사이공응우선정비(府使 李公膺愚善政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2839책 (탈초본 132책) 고종 14년 6월 20일 갑진 23/42 기사 1877년 光緖(淸/德宗) 3년 ○ 李萬稙以吏批言啓曰, 江陵大都護府使, 今當差出, 而本府以關東雄邑, 物衆地大, 素稱難治, 不可不擇差, 同道及他道有聲績已準限未準朔守令, 竝擬, 何如? 傳曰, 允。 再度, 洪輔燮爲司饔直長, 崔翰周爲司宰直長, 南廷莢爲北部令, 徐相祖爲古阜郡守, 李膺愚爲江陵府使。
강릉시립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조 고종대의 강릉부사 이서영의 선정비로서 비석의 전면에는 부사이공서영선정비(府使李公瑞永善政碑)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돌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석의 크기는 가로 40.5 세로 108, 두께15.5센티입니다. 이서영은 덕수인으로 1855년 철종8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민성이다. 선정비는 1890년인 경인년 팔월에 건립되었다. 승정원일기 2977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9월 22일 경오 35/53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 有政。 吏批, 判書趙秉世進, 參判趙榮夏進, 參議李鎬喆進, 左副承旨金昇圭進。 以閔泳煥·韓章錫爲賓客, 尹榮信爲大司憲, 金稷鉉爲大司諫, 宋淳鐸爲副修撰, 趙定熙爲同敦寧, 金丙基爲兵曹參知, 鄭範朝爲禮賓提調, 李建弘爲孝陵參奉,..
가고리는 본래 보은군 산외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 더구리 또한 덕우리(德友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고리(加古里)라 하였다. 교통은 마을 앞을 지나 청원군 금관리를 잇는 아스팔트 도로가 2차선으로 뚫려 있다. 자연마을 골-말 : 더구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서쪽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었다고 하여 골마을이라고 한다. 부자-골 : 옛날에는 부자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기왓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함. 양지-말 : 골말의 동쪽 가막골 고개 밑에 있는 양지쪽 마을. 중-뜸 : 골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더구리 중간이 됨. 기타지명 가막골-고개 : 더구리에서 미원면 금관리 가막골로 넘어가는 고개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하며, 흙이 질어서 가막골 고개라고도 한다. 국수봉 ..
송암리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속하는 법정리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흑암리(黑巖里)와 팔송리(八松里)를 병합하면서 흑암과 팔송에서 한 자씩을 따서 송암리(松巖里)라 하였다. 옛날 팔송리에는 8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송암리는 남쪽의 가섭산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조(영조 35)에는 “이곳은 신석면(薪石面) 여탄리(汝呑里) 지역으로 충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50리 거리에 위치하며, 124가구에 총 714(남 347, 여 367)명이 거주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흑암리와 팔송리를 통합하여 송암리라 하였다.남쪽에 가섭산 줄기가 음성군 음성읍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은 지형으로 ..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 송암공원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종완여사의 효열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벽진이종완여사효열비(碧珍李鍾㛡女史孝烈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강릉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엘 가면 조금 특이한 비석을 볼수가 있습니다. 신분제도가 확실했던 조선조시절 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고 열심을 낸 노비의 비석입니다. 전국적으로 노비들의 비석은 희소성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노비들의 비석은 가문을 중시했던 그 시절의 자신들의 가문을 빛내기 위한 도구(?)로 쓰인것도 있겠지만은 삐딱선으로 보는 눈길보다는 열심을 냈던 그 시절의 한펀 일겁니다. 문리동은 관노였으니 그 범주에서는 벗어날수 있겠습니다. 조선 중기의 충노(忠奴)였던 문리동(文里同)의 비석입니다. 문리동은 관노로서 임진왜란 당시 강릉부사 이광준(李光俊)을 모시고 전란을 피하여 헤매다가 양식이 떨어지자 흩어진 나락을 주워 연명하게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사를 섬겼다. 주민들이 충성을 다하여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