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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10 (10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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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3리는 용암마을이라고 불리우는 고창오씨들의 집성촌입니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리(龍岩里)라 불리던 마을이며, 1739년 기록에는 군동면 용암리에 47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기록에는 55호에서 15세 이상 255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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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현리에 있는 조선조때 전주목사와 전라북도 관찰사를 지낸 김명수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전주관찰사김공명수영세불망비(全州觀察使金公命洙永世不忘碑)라고 적혀 있습니다.김명수는 조선후기 대한제국시대때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북도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 1903[계묘(癸卯)] 11월(十一月)을 지냈습니다. 김명수의 비석옆에는 옥천군수를 지낸 황종림의 비석도 서있습니다. 비석이 서있는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서낭당자리인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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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서대리 서대저수지 밑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덕산張德山의 처 광산김씨(光山金氏, 19세기 말엽)의 열부비입니다. 광산김씨는 안내면 정방리에서 태어나 안내면 서대리 장덕산張德山에게 출가하였다. 시집을 온 뒤 그녀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광산김씨는 남편 몫까지 맡아서 집안일을 하고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며 살았다. 이후 4년 만에 남편이 귀국하였는데 심한 병에 걸려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 간호에 온 정성 을 다하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했다. 남편의 병은 십 년을 넘어 계속되었으나, 한 번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십 년을 언제나 똑같이 성심과 정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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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자방(郭自防, ?∼1592 선조 25)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곽지정郭之楨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 곽언郭諺이며,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다. 옥천의 선산곽씨는 입향조의 11세손 곽은郭垠의 후손으로 이 지역의 사족인 옥천전씨·하동정씨·개성김씨 등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옥천의 사족으로 군림해 왔다. 곽자방은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를 사위로 맞이하여 후에 선산곽씨의 각종 문헌을 송시열이 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유건鄭惟謇의 조카從子 정점鄭霑과 박인의 아들인 박익성朴益誠은 곽은의 증손서曾孫婿로 곽자방과는 4촌간이 된다.이와 같이 옥천지역의 유력한 사족들과 혈연으로 연결된 선산곽씨에서 의병에 나섰던 곽자방·곽현郭鉉·곽숭인郭崇仁 3인 중 가장 활발한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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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하랴? 언제든 달려가면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거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이 없다.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았던 둥근 받침돌이 2단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윗면 가운데에 높히 솟아오른 부분을 두어 여기에 깃대를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둥 안쪽면에는 아래위로 홈을 두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조각솜씨가 세련되거나 정교하지 못하나 간결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