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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서대리는 원래 대동리에 속해있던 마을이었으나 서대리라 불리게 되었다.서대리 마을길가에 있는 근래에 세운 석장승입니다. 서대리가 속해 있던 대동리는 1739년에는 56호에 15세 이상 된 사람이 187명이 살았고, 1891년 기록에는 109호에 472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상당히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 때에 대동리를 동대리와 서대리 등 두개 리동으로 나누었다. 서대리라 부르게 된 것은 대동리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서대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뱀골, 용촌골, 터골(基谷), 새말, 꽃밭골 등이 있으며, 마을을 가로질러 방하목리로 연결되는 도로가 새로 개설되었고 도율리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새롭게 뚫려 새로운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1954년 서대저수지가 축조되었..
화학2리에 자리하고 있는 배천인 조완수의 송덕비 입니다. 송덕비에는 배천조공완수송덕비(白川趙公完壽頌德碑)라고 써있으며 1978년 부락민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비석의 좌측면에는 조완수의 부인인 박용심(朴龍心)의 이름도 각자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후면에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무렵 마을회관을 지으려 할 때 회관부지를 기증하여 마을회관을 건립하는데 큰공덕이 있다고 하여 송덕내용을 각자하여 놓았습니다. 1978년에 주민 이름으로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화학리는 화일리(禾日里)와 학촌리(鶴村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화일리라 하여 74호가 1891년 기록에는 화일리에 22호, 학촌리에 29호 등으로 분구되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화일과 학촌이 합하여 화학리(禾鶴里)가..
옥천읍 교동리에 자리하고 있는 옥천향교 대성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물입니다. 석물이 원래의 자리는 아닌 듯 합니다. 폐사지 등 다른 곳에 있던 석물을 가지고 와서 사용하는것 같습니다. 향교등에 의식이 있을 때 손을 씻는 그릇을 얹어 놓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옥천읍 수북리 화계마을에 있는 1723년(경종3) 세워진 정려이다. 건물양식은 다포형식의 공포와 맞배지붕형태의 목조기와집이다. 건물의 한평으로 건립되였으며 지금은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윤세鄭潤世의 처 밀양박씨(密陽朴氏, 18세기 초엽) 밀양박씨는 영동 출생으로 어린 나이에 동이면 지양리紙羊里 현동마을의 정윤세에 게 출가하였다. 그녀는 비록 시댁의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하였으나, 시부모를 지성으로 모시고 남편에게 순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영동 처가에 다녀오다 살인 누명을 쓰고 관가에 잡혀 갔을 때 남장을 하고 관가에 들어가 남편 대신 감옥살이를 했다. 재판을 받는 과정 에서 살인범이 잡혀 남편의 누명을 벗고 자신도 살게 되었다. 스무 살 되던 해에 남편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전엽의 효자문입니다. 전엽의 효자문 건너편으로는 호랑이가 파 주었다는 호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엽(全燁, 1505 연산군 11~1583 선조 16)은 호는 쌍암雙岩, 본관은 옥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상주목사 등을 지낸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1480~1560)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며, 부친상을 당한 뒤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다. 시묘기간 중에 흰 제비가 깃들었으며, 묘 근처에 우물이 없어 고생을 하였는데 하루 는 호랑이가 나타나 앞발로 바위 밑을 한참 후벼 파니 샘이 솟아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므로 3년간 무사히 시묘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60세 되던 ..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안동권씨묘역 권걸의 무덤앞에 있는 장명등입니다. 장명등은 사찰뿐만 아니라 능묘 앞에 세워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기능을 갖고 있다. 고려 말에 처음 보이는데, 공민왕 현릉(玄陵)의 장명등 이후 왕릉에는 반드시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품 이상의 재상의 묘역에만 세울 수 있었으므로, 매장된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물이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불을 밝힐 수 있는 장명등의 화창(火窓) 부분에 실제로 기름 등잔을 놓아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으나, 점차 형식적인 장식물이 되었다. 받침대와 몸체, 지붕의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초기에는 길고 날씬한 기둥 모양이었으나 차차 작고 뭉툭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