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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10 (10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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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녁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보살사 부도밭. 가볼까? 살그머니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른 아침 눈 맞추고 왔습니다. 시원한 아침바람에 보살사 부도님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 떨게 한다고 뭐라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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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도율리 도가실 마을 입구에 있는 전종익의 자헤비입니다. 전종익은 동네주민들의 세금을 혼자 부담하여 세금대납을 해주었으며 마을주민들을 위하여 많은 선한일을 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동리 주민들의 이름으로 경신년(庚申年)서기 1920년 10월에 건립하였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전종익자선지비(全鍾翼慈善之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전종익 자선비는 마을사람들이 도가실에 살았던 전종익(호적상 이름이고, 전백원씨로 불렸다고 함)씨의 선행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한다.“전백원씨가 땅이 많고 부자였어. 도지만 100섬을 걷을 정도였다고 해. 그래서 마을 살림이 힘들면 마을세금을 대납하고 가난한 이웃을 늘 도왔어. 마을에 큰 부자가 있다보니 도둑들이 끊이질 않아서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떠나면서도 자기 땅을 싼 값에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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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제는 본관은 안동. 자는 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아버지는 권근(權近)이다. 부인은 판사 이휴(李携)의 딸이다. 음보로 경승부주부(敬承府主簿)에 기용되었고 후에 감찰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정랑·예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416년(태종 16) 성균관사예, 1418년 의정부사인·전사소윤·세자시강원문학을 지냈다. 1419년(세종 원년) 사헌부집의가 되어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승정원동부대언·승정원좌대언을 지냈다. 1423년(세종 5) 모친상을 마친 후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판·대사헌·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평안도관찰사겸평양부윤, 1430년(세종 12) 경창부윤, 1431년 경기도관찰사, 1433년 예조좌참찬·예조판서, 14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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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교동리 비석거리에 있는 옥천군수를 지낸 조종순의 선정비입니다. 행군수 조후종순 영세불망비 (行郡守 趙候鍾淳 永世不忘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조종순은 양주인으로 자는 공례(公禮)이며 1777(정조1년)에 출생하였으며 용인현령및 옥천군수등 많은 지방관을 역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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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귀화리에 있는 경주인 최면식의 자혜송덕비입니다. 비석은 화정동주민의 이름으로 2008년 6월에 건립하였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경주최공명식자혜송덕비( 慶州崔公明植慈惠頌德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최명식의 송덕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송덕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은 경주최씨 최치원의 30대손이다. 공은 1964년 충남 조치원에서 이곳(화정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동민으로서 많은 일을 하시고 돌아가셨다. 공은 천성이 고결하고 선비로서의 기질 또한 특출하였다. 부모님을 섬기는데 효성을 다 하였고 언행이 엄중하며 예의에 어긋남이 없이 생활하였다. 효와 함께 공손함이 근본이 되어 동민들과의 화목이 두터우셨으며 글농사로서 문한가의 위치에 서있어 마을주민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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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지리(莫只里)는 원래 안내면 막지리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북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 보면 안내면 막지리라 하여 40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는 46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내면에서 군북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막지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이 강가에 위치하여 포전(浦田)이 많아 보리농사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이곳을 지나다 많은 보리밭을 보고 맥계(麥溪)라고 했다는 것. 이는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막지리의 본래 지명은 맥계이며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편리한대로 썼던 막지(莫只)라는 지명보다 본래 지명을 되찾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맥기,..